"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아폴로 11호 달착륙.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아폴로 11호 선장 닐 암스트롱의 말이다. 당시는 너무 어려서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와 함께 흥분했던 한 사람으로 그날의 추억을 소환한다.
50년 전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베이비부머로 경제발전의 혜택을 조금씩 이나마 보기 시작하는 세대였다. 겨우 읍내에 전기가 들어왔고 팍팍했던 현실이었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만큼은 작지 않았던 시기였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할 계획이며 그 장면을 TV를 통해 중계한다고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초딩의 눈에도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30만에 육박하던 인구를 가진 농촌 상주에 몇 대의 TV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암튼 너무 귀한 물건이어서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웠던 것은 기억이 난다.
등하교길에 마주치는 주물공장(고철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드는 작은 제철소) 사장님댁에 TV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다행히 그 댁 아들이 나와 같은 학년이어서 용기를 내어 달착륙 장면을 보고자 그 집에 오후 시간을 눌러앉았다. 난생처음 실물로 접견하는 TV, 이어서 보게될 인류사적인 이벤트, 당연히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얗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핸드폰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어둡도록 귀가하지 않는 초등학생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암튼 그 고장에서 TV화면을 통해 인류가 달 착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몇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는 생중계인지, 녹화방송인지에 대한 관념도, 알길도 없이 첫 TV 화면을 마주한 일생일대의 사건이기도 했다. 나는 느긋하게 방송을 다 보고 길을 나섰고 나를 찾아나섰던 친척분을 집에 가는 도중에 만나 이미 어두워진 귀갓길을 재촉해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TV를 보았던 곳과 집은 약 1Km 남짓한 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사라진 초등학생의 귀가를 기다리는 어른들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으리라. 꾸지람 보다는 눈물바람으로 나를 반겨준 가족들에게 나 또한 벙벙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저지른 의도된 첫 불효였다.
이튿날부터 달나라에 인류가 착륙했다는 것에 모든 사람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만간 인류사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닥칠 것이라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충격이 컸다.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 동화도, 배경 무대에 등장하는 계수나무도 이제는 과학과 탐험 앞에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놀이였던 딱지치기의 그림에는 아폴로 11호 우주선, 그리고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3명의 영웅이 장식하였다.
목숨을 건 최초의 시도는 언제나 극한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심이 없이는 인류사 또한 이렇게 진보되지 못했으리라. 1960년대가 저물기 전에 인류가 달에 착륙하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John F Kennedy 대통령, 정당을 달리하지만, 국가의 중점 사업으로 견조하게 국익을 위해 추진해온 정치지도자들이 존경스럽다. 인간의 호기심이 없어지는 순간 젊음도 끝이 난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미 50년이 지났으니, 나도 연식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도 한 줌 호기심을 꼭 부여잡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2020-08-03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아폴로 11호 달착륙. 인류 최초로 달에 발자국을 남긴 아폴로 11호 선장 닐 암스트롱의 말이다. 당시는 너무 어려서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세계와 함께 흥분했던 한 사람으로 그날의 추억을 소환한다.
50년 전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베이비부머로 경제발전의 혜택을 조금씩 이나마 보기 시작하는 세대였다. 겨우 읍내에 전기가 들어왔고 팍팍했던 현실이었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만큼은 작지 않았던 시기였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할 계획이며 그 장면을 TV를 통해 중계한다고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초딩의 눈에도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30만에 육박하던 인구를 가진 농촌 상주에 몇 대의 TV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암튼 너무 귀한 물건이어서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웠던 것은 기억이 난다.
등하교길에 마주치는 주물공장(고철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드는 작은 제철소) 사장님댁에 TV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다행히 그 댁 아들이 나와 같은 학년이어서 용기를 내어 달착륙 장면을 보고자 그 집에 오후 시간을 눌러앉았다. 난생처음 실물로 접견하는 TV, 이어서 보게될 인류사적인 이벤트, 당연히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얗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핸드폰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어둡도록 귀가하지 않는 초등학생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암튼 그 고장에서 TV화면을 통해 인류가 달 착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몇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는 생중계인지, 녹화방송인지에 대한 관념도, 알길도 없이 첫 TV 화면을 마주한 일생일대의 사건이기도 했다. 나는 느긋하게 방송을 다 보고 길을 나섰고 나를 찾아나섰던 친척분을 집에 가는 도중에 만나 이미 어두워진 귀갓길을 재촉해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TV를 보았던 곳과 집은 약 1Km 남짓한 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사라진 초등학생의 귀가를 기다리는 어른들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으리라. 꾸지람 보다는 눈물바람으로 나를 반겨준 가족들에게 나 또한 벙벙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저지른 의도된 첫 불효였다.
이튿날부터 달나라에 인류가 착륙했다는 것에 모든 사람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만간 인류사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닥칠 것이라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충격이 컸다. 옥토끼가 방아를 찧는 동화도, 배경 무대에 등장하는 계수나무도 이제는 과학과 탐험 앞에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의 놀이였던 딱지치기의 그림에는 아폴로 11호 우주선, 그리고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3명의 영웅이 장식하였다.
목숨을 건 최초의 시도는 언제나 극한 긴장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심이 없이는 인류사 또한 이렇게 진보되지 못했으리라. 1960년대가 저물기 전에 인류가 달에 착륙하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John F Kennedy 대통령, 정당을 달리하지만, 국가의 중점 사업으로 견조하게 국익을 위해 추진해온 정치지도자들이 존경스럽다. 인간의 호기심이 없어지는 순간 젊음도 끝이 난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미 50년이 지났으니, 나도 연식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오늘도 한 줌 호기심을 꼭 부여잡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다.
2020-08-03